글로벌 스위스

1. 베른의 아리랑 


아담한 도시였다. 인구는 고작 13만 명이다. 규모로 보자면 지방 소도시에 어울릴 법 하거만, 명색이 스위스 연방의 수도란다.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수도의 하나라고 하겠다. 넓이보다는 깊이가 도드라진 도시이다. 15세기 중세풍이 완연하다. 단연 돋보이는 곳은 구시가이다. 필히 대성당의 첨탑이나 언덕배기 장미공원에 올라 아름다운 시가지를 내려다보아야 한다. 고색창연한 지붕들과 천혜의 알프스가 어우러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1983년 이 일대가 통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저간의 사정이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역사도시의 개성(個性)이 물씬하다는 점에서 스위스의 베른은 언뜻 북조선의 개성(開城)과 은근히 닮았다.

 백미는 마르크트 거리이다. 감옥탑부터 시계탑까지 회랑형 석조 아케이드가 양쪽으로 쭉 펼쳐진다. 비가 오더라도 젖을 걱정 없이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아케이드 곳곳에 보석처럼 숨어있는 트렌디한 카페와 레스토랑은 활기로 가득 차다. 개성 넘치는 부티크들을 꼼꼼히 살피노라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마터호른 꼴을 하고 있는 토블론 초콜릿도 유난히 달콤한 것 같고, 에멘탈 치즈를 곁들인 와인 한 모금도 일품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베른에서 20세기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살았다. 1903년부터 1905년까지 2년간 머물렀다. 지금은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꾸며두었다. 시계탑에서 불과 200m 떨어진 크람 거리에 자리한다. 노벨상을 안겨준 상대성 이론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 것이다. 1층에는 아인슈타인 카페가 차려져 있고, 2층에는 베른 시절 아인슈타인의 사진과 자료들, 가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세의 풍경도 20세기 최대의 과학적 발견도 인상적인 도시이지만, 베른에 머물렀던 이틀간 나의 의식은 온통 유라시아의 반대편, 북조선의 평양에 가닿아 있었다. 바로 이 곳에서 김정은과 김여정이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도 아인슈타인처럼 딱 2년을 머물렀다. 1998년 가을에 와서 2000년 가을에 떠났다. 1998년은 내가 대학교 새내기가 된 해이고, 2000년 여름방학에는 생애 첫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어쩌면 잠시나마 그들과 한 하늘 아래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특이한 것은 두 사람 모두 국제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 다녔다는 점이다. 김정은은 '박은'이라는 가명으로 리베펠트-슈타인횔츨리 공립학교에 다녔고, 김여정은 ‘정순’이라는 가명으로 헤스구트 공립학교에 다녔다. 보안 때문이었지 싶다. 통상의 고위층 자제나 외교관 자녀들은 국제학교에 다닌다. 낯선 북조선 학생이 입학하면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부모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일부러 주목을 덜 받는 공립학교에 보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김정은의 학교생활은 단짝 친구였다는 스위스인 즈아오 미카엘로의 인터뷰를 통해 조금 알려졌다. 미카엘라에 따르면 열여섯 살 정은이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유독 농구를 좋아했다 하고, 영화와 게임, 컴퓨터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지는 않다. 자연과학, 수학, 문화, 사회, 독일어 등에서 과락을 겨우 면했을 정도이다. 스위스는 독일어와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로망슈어를 공영어로 쓰는 나라이다. 세계보편어 영어도 아니고, 한 시절 북조선의 제1외국어였을 러시아어도 아니다. (참고로 러시아혁명의 최고지도자 레닌 또한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베른에 머물렀다.) 아마도 낯선 나라 낯선 말, 낯 설은 환경 속에서 남매의 우애는 무척 도타웠을 법하다. 모국어 조선어를 마음껏 쓰며 화기애애 속정을 쌓았지 싶다.  

 정은이와 여정이는 3층짜리 연립주택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당시 두 남매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리수용이다. 리철이라는 가명으로 제네바 공사와 스위스 대사를 역임했다. 훗날 외무상에 등극하고 외교담당 국무위원까지 맡게 되는 바로 그 리수영이다. 2011년 김정은 위원장이 3대 세습으로 권력을 승계한 이후로 출세 가도를 달린 셈이다. 스위스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추정이지 싶다. 고로 여러 측면에서 20세기 말의 베른은 21세기 전반기 북조선의 장래를 잉태하고 있던 의미심장한 장소였던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김여정 부부장이 공부했다는 학교를 부러 찾아가 둘러보았다. 내친김에 살았다는 집까지 살펴보고 싶었으나 정확한 주소를 알아낼 길이 없었다. 대신에 찾은 곳이 “아리랑”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이다. 자그마한 도시, 베른 기차역에서 걸으면 5분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저녁 식사 시간, 스위스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나 K-팝과 K-컬쳐, K-푸드도 각광이다. 석 달째 유럽 견문, 찌개나 육개장 같은 매콤하고 뜨거운 국물 요리가 몹시 댕겼으나 메뉴판에는 없었다. 꿩 대신에 닭, 비빔밥에 불고기를 시켜 아쉬움을 달래었다. 모처럼 아삭하고 새빨간 배추김치가 입맛을 한껏 돋운다. 깔끔하면서도 진하고 짙은 동방의 풍미이다. 혹 20여 년 전, 정은이와 여정이도 이 곳에서 한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래지 않았을까?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값비싼) 소주 한 병을 시켰다.


2. 제네바와 개경   

 

 스위스는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나라에 속한다. 면적이라고 해봐야 겨우 4만 1,277km2 남짓이다. 동서로는 350km, 남북으로는 220km이다. 남북을 종단하면 자동차로는 3시간, 기차로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알프스를 품고 있는 고로 드라이빙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기에는 더없이 안성맞춤한 곳이다. 그러나 교통이 늘 이토록 잘 마련되어 있던 것은 아니다. 스위스의 지형을 서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레만호와 주라산맥, 라인강과 보덴호를 만나고 알프스 산맥에 이른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산악 국가였던 탓에 엄혹한 땅에서 안락한 생활을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오랜 기간 스위스의 가장 큰 수출품이 척박한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신체 강건한 용병이었을 정도이다.    

 그만큼 지리는 일종의 숙명이다. 지정학과 지경학, 지문학을 결정한다. 그러함에도 나라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역시나 역사이다. 유럽의 한복판이라는 위치를 십분 활용했다. 대국 사이의 소국이라는 위상을 백번 이용했다. 백년대계, 소국의 소외를 딛고 현재의 영광을 일구어낸 것이다. 먼저 지중해의 이탈리아와 알프스 이북의 내륙을 잇는 유럽의 남북교통의 요지로 거듭났다. 이 교통망의 대동맥이 바로 라인 강이다. 라인 강과 함께 스위스에서 발원하는 론 강 또한 중요하다. 유럽의 서부와 지중해를 잇는 수상교통을 연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럽의 동서교통의 축, 도나우 강으로 흘러나가는 인 강 역시도 스위스를 원류로 하고 있다. 산길을 뚫고 물길을 내면서 변경에서 중앙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 지리적 위상 변화가 정책적으로 발현된 것이 바로 스위스의 국시라고 할 수 있는 ‘영세중립’이다. 중계하고 중재하면서 중립을 고수한다. 역시나 평지돌출이 아니다. 역사적 유산이 제법 두텁다. 16세기 초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영향이 스위스에도 미쳤다. 스위스는 신교와 구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을 피하기 위하여 외국의 용병 파견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한 세대, 30년 전쟁(1618-1648)을 통해서 엄정 중립을 사수한 것이다. 그 공적을 인정받아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 나아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후의 유럽질서를 논하는 빈회의(1814-1815)에서도 다시금 영세중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20세기 제 1차, 제 2차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는 유럽의 지평을 넘어 세계평화의 차원에서도 영세중립국가의 상징이 되었다. 1920년 국제연맹의 본부가 제네바에 설립되었고, 1945년에는 국제연합의 유럽 본부가 제네바에 자리 잡았다. 제네바회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한국전쟁 휴전(1954)부터 북미 핵합의(1994)까지 북조선과도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UN의 유럽 본부만 제네바에 있는 것이 아니다. UN과 관련된 200여개 이상의 NGO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세계무역기구(WTO), 세계보건기구(WHO), 적십자국제위원회(ICRC), UN 난민 고등판무관(UNHCR)의 본부도 자리한다. 1985년 미소 정상회담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가 악수를 나눈 장소도 제네바였다. 그밖에도 로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자리하고, 월드컵을 주재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은 취리히에 터하고 있다. 각국의 중앙은행 간 협력을 추진하는 국제결제은행(BIS)은 바젤에 위치한다. 지난 반세기 전 세계의 리더들을 끌어 모으며 시대정신을 선도해왔던 세계경제포럼(WEF) 또한 매해 겨울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다.      

 그래서 어느 도시를 가도 다문자 표기가 일상화되어 있다. 4대 공영어는 물론이요 영어까지 다언어 생활이 일상다반사이다. 취리히는 독일어권의 으뜸도시이고, 제네바는 프랑스어권의 일등도시이며, 베른은 독어와 불어를 공영으로 쓴다고는 하지만, 어느 도시를 가도 다문자 생활이 습관이자 문화로 굳어져있다. 이틀 내내 베른 거리를 쏘다니는 동안 내 귀에 포착된 외국어만 해도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 터키어, 알바니아어 등 다종다양했다.    

 그 다언어/다문자의 세계도시를 견문하면서도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운 도시는 재차 개성이었다. 고려 시대의 수도였던 곳이다. 고려는 당대의 몽골세계제국의 지식 네트워크를 통하여 유라시아 곳곳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라시아의 서쪽에 살아가는 사람들도 우리를 지금껏 고려인(korean)이라고 부른다. 남쪽의 이슬람문명권에서는 ‘쿠리야’라고 칭하며, 북쪽의 정교문명권에서는 ‘카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세계국가 고려(高麗)의 속성만큼이나 수도의 명칭 또한 의미심장했다. 당시에는 ‘개경’(開京)이라 불리었으니, 한자를 그대로 풀면 열린 도시(Open City), 요즘 식으로 옮기자면 허브시티(Hub City)였던 것이다. 실제로 개경의 관문이었던 벽란도는 유라시아의 만인이 교류하고 만물을 교역하는 세계시장(global market)의 하나였다. 유라시아 동서남북의 언어가 들려왔을 것임은 당연지사였다 하겠다. 

 고로 남북협력의 상징적 장소인 개성공단이 잠시 멈춤하고 있는 현재를 지혜롭게 활용할 필요가 크다. 북쪽의 저렴한 노동력에 남쪽의 기술과 자본을 결합하여 세계시장에 공산품을 수출한다는 발전모델의 업그레이드와 업데이트를 도모하기에 적기인 것이다. 나로서는 개경의 역사성과 세계성을 극대화시키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주목하는 것은 개경에는 한반도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는 국자감이 자리했다는 점이다. 동북아시아 국제대학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이지 않을까? 앞으로 동북아 공동체를 일구어가기 위하여 필요한 다양한 국제기구들에서 일할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대학을 만들어봄직 한 것이다. 응당 교수진도 남북은 물론이요 러시아와 미국, 일본과 중국을 망라해서 꾸려야 할 것이며, 학생들 또한 다국적으로 선발해야 할 것이다. 4년간 이웃나라의 친구들과 공부하고 연애하면서 자연스레 다언어/다문자에 익숙해지는 동북아시아의 미래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세계전도를 펼치노라면 개성의 위치가 기가 막히다. 남북으로는 평양과 서울 사이로되, 바다 건너 동서로는 베이징과 도쿄 사이이며, 멀리로는 구대륙 유라시아의 모스크바와 신대륙 아메리카의 워싱턴 사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세기 한반도에서 얽히고설킨 비극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21세기 평화체제의 실마리, 요람이 될 만하다.   

 글로벌 도시로서의 개성을 전망하는 것이 허황한 뜬구름이 아니라는 점은 동북아 곳곳에서 이미 그러한 도시들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소 다녀온 곳만 해도 여럿이다. 요동반도의 끝, 다롄에서 지하철을 타면 중국어-영어-한국어-일본어-러시아어 순으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북해도, 홋카이도의 관문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도 일본어-영어-중국어-한국어-러시아어로 만들어진 안내표지를 만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 북조선이 맞닿는 국경도시 훈춘은 아예 도시 전체가 다언어/다문자로 조성되어 있다. 국제버스역부터 시내의 식당과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온갖 간판이 로마문자와 키릴문자에 한문과 한글까지 병기되어 있는 것이다. 훈춘은 북조선의 경제특구이기도 한 나진선봉과도 지척인 바, 북조선을 주위로 형성되고 있는 다문자/다언어 미래도시의 등장을 김정은과 김여정도 눈여겨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베른에서 생활했던 그들의 10대를 상기하노라면 그다지 낯선 풍경이 아니라고 느낄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실로 서로는 프랑스, 북으로는 독일, 남으로는 이탈리아, 동으로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제국의 후예)를 접하고 있는 유럽의 소국 스위스와 북조선의 지정학은 포개지는 바가 없지 않다. 서로는 중국이 북으로는 러시아가 동으로는 일본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에도 세계 10대 경제대국인 한국이 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주체를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스위스 또한 여지껏 EU(유럽연합)에 가입하지 않고 통화주권을 고수하며 고유한 영세중립을 사수할 만큼 외통수인 점 역시도 적잖이 닮았다. ‘고난의 행군’ 끝에 찾아올 ‘단번도약’이 미국이나 중국, 혹은 한국과의 일방적 로맨스로 귀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기생(dependence)도 아니요, 홀로됨(in-dependence)도 아닌 상호진화(inter-dependence). 옹골찬 주체노선이 외골수 고립이 아니라 자립과 중립으로 진화할 수 있다면 최상일 것이다. 어찌 보면 북조선은 1910년 나라를 잃은 이래로 100년이 넘도록 항일전쟁과 항미전쟁에 남북경쟁까지 수행하고 있는 바, 어느 국가보다 전시체제를 오래 경험한 탓에 ‘영구평화’를 더더욱 미래의 사명이자 국시로 삼아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30년, 한 세대를 내다보며 동북아의 스위스, ‘글로벌 북조선’의 발상과 ‘글로벌 개성’의 상상을 가다듬어 감직하다.   

 스위스가 북조선의 장래에 참조가 되는 것은 비단 그 국제성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21세기 인류문명의 사활적 과제는 생태와 생명일 것인바, 이 방면으로도 스위스는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그린 스위스’의 정수, 투명한 밤하늘에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알프스의 마터호른으로 이동한다.

출처 |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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