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산치수(治山治水) : 알프스와 강원도
1. 산길, 물길, 철길
스위스 하면 알프스다. 알프스가 곧 최고의 자연 보배이자 최상의 자원 보고이다. 스위스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6할이 곧장 알프스로 달려간다. 유럽에서도 가장 큰 산맥으로 유럽의 중앙부를 동서로 1200km나 가른다. 그 중 20% 남짓이 스위스에 자리하고 있다. 국토의 6할이 온통 알프스산인 것이다. 알프스 평균 고도가 1700km이니 스위스는 전형적인 산악 국가, 뫼의 나라이다. 북위 45도에서 49도 사이,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보다도 더 북쪽에 터하고 있다. 위도도 높고 고도도 높은 고고(高高)한 나라이다.
쥐라 산맥도 있다. 넓이는 60km 길이는 250km, 영토의 1할을 차지한다. 켈트어로 ‘숲’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레만호에서 라인강까지 굽이굽이 뻗어 있다. 프랑스 동부와 독일의 남부를 잇는 석회암 산맥이다. 평균 해발 700m, 알프스 못지않게 아름다운 아고산지대이다. <쥐라기 공원>으로 널리 알려진 쥐라기라는 개념이 바로 이곳에서 유래하였다. 과거에는 바다였다고 한다. 웅장한 알프스의 조산운동으로 쥐라까지 덤으로 솟아오른 것이다. 그래서 암모나이트 화석이 지금도 종종 발굴된다. 이 암석을 연구한 18세기 후반의 지질학자들이 ‘쥐라기’라는 명칭을 공식화한 것이다.
알프스와 쥐라, 양대 산맥을 겸하면서 스위스는 4000m가 넘는 산을 48좌나 보유하고 있다. 이 작은 나라에 드높은 봉우리가 경쟁적으로 솟아 있는 것이다. 알프스 최고봉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에 걸쳐있는 몽블랑(4810m)이고, 스위스 최고봉은 몬테로자(4634m)이다. 유명세로 치자면 으뜸은 마터호른이다. 하늘과 맞닿는 4478m, 3454m에 자리한 융프라우가 마터호른으로 가는 중간 거점이다.
두 산맥 사이로 약 3할의 국토가 고원지대이다. 레만호와 보덴호 사이, 중앙고지에 스위스 국민의 대다수, 7할이 살아간다. 평균 고도 580m, 여름 평균 기온 20-25도, 겨울 평균 온도 2-6도의 쾌적한 환경이다. 제네바부터 취리히까지 스위스를 대표하는 주요 글로벌 시티들도 바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산이 깊으면 물도 맑다. 깊은 산속 옹달샘을 유럽인이 나눠먹는다. 스위스는 유럽 총면적의 0.4%에 불과하지만 담수의 비축량만 따지면 6%에 이른다. 알프스 전체로는 26%를 저수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유럽의 분수령(分水嶺)인 셈이다. 라인강과 로이스강, 티치노강과 론강 등 유럽의 주요 강들이 알프스에서 발원한다. 알프스 빙하가 녹은 담수가 북으로는 독일과 네덜란드를 지나 북해에 가닿고, 남으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지중해를 만난다. 그리스의 와인이 프랑스로 건너와 보르도와 브루고뉴 명산지에 전파된 것도 이 하천망 때문이었다. 스위스에 수원을 둔 주요 강들이 사방팔방 흘러가서 문화를 전파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사통팔달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산에서 물이 흘러가면 강이 되고, 산 속에 물이 고이면 호수가 된다. 스위스에는 자그마치 1,500개의 호수가 있다. 가람의 나라일 뿐만이 아니라 호반국가이기도 한 것이다. 거개가 산정호수이고 빙하호수이다. 프랑스 국경의 제네바 호와 독일 국경의 보덴 호를 첫손에 꼽는다. 스위스 국내만 따지자면 뇌샤텔호가 가장 크고, 루체른호와 취리리호 등도 제법 크다. 눈 녹은 호수에 비친 알프스의 그 눈 시린 풍경은 하늘이 이 땅에 허여해준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함에도 19세기까지 스위스 여행은 극히 드물었다. 험준한 알프스 산맥 탓에 이웃나라에서 스위스로 가기가 마땅치 않았다. 스위스 내부에서의 이동조차 여의치 않았던 시절이다. 우뚝 솟은 알프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도시를 방문할 때 가급적 빨리 통과해버리면 좋을 장애물이었다. 반전의 계기는 계몽주의에 반감을 품은 낭만주의의 출현이다. 루소와 바이런과 괴테 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근대성에 물들고 있는 도시문명을 비평하며 알프스의 자태를 칭송해마지 않았다. 근대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알프스의 매력은 더욱 깊어졌다. 야만으로 비하했던 풍광이 어느 순간부터 낭만의 정점으로 뒤바뀌어 간 것이다. 조야한 이미지가 근원적 이미지로 탈바꿈하였다. 수많은 도시인들이 야생을 즐기고자 굳이 구태여 알프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19세기 토마스 쿡이 출범시킨 알프스 단체여행 상품은 대박을 터뜨렸다. 산악인들도 경쟁적으로 알프스 영봉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등산이라는 매우 이례적인 행동이 어느덧 가장 각광받는 대중적 스포츠가 된 것이다. 알피니즘의 탄생이다.
그러나 등산화와 등산복만으로는 알프스에 오르기 힘들었다. 험한 산길과 거센 물길을 잇는 매끄러운 인공 통로, 철도의 건설이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알프스 여행의 백미는 역시나 등산 열차이다. 스위스가 품고 있는 가장 웅장하고 가장 아름다운 절경을 창밖으로 지긋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장까지 통유리로 된 파노라마 특실 객차도 있다고 한다. 베르니나 특급, 빌헴틀렘 익스프레스, 골든패스 등 4대 특급열차 가운데 내가 타 본 것은 마터호른을 향해가는 빙하특급(Glacier Express)이었다. 평균속도 34km, 세계에서 가장 느긋하고 느릿하게 달리는 특급열차이다. 291개의 다리와 91개의 터널을 지나 8시간 동안 울창한 삼림과 호젓한 호수와 시원한 계곡을 통과한다. 산골짜기에서 요들송을 부르며 무해한 삶을 살아가는 스위스 시골사람들의 순박한 생활도 엿볼 수 있다.
산악열차는 해발 3454m에 자리한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흐까지 닿는다. 1912년, 장장 16년의 공사 끝에 전면 개통한 꼭지점이다. 온통 만년설로 뒤덮힌 마터호른이 맞은편에 떡하고 당당히 꼿꼿이 버티고 서있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탄성이 절로 새어나온다. 사피엔스가 등장하기도 훨씬 이전부터 솟아오르기 시작한 거대한 바위일 것이며, 스위스라는 나라가 탄생하기 훨씬 전부터 쌓여왔을 두텁고도 두꺼운 빙하이다. 일순에 일년, 십년, 백년 역사적/인간적 시간감각이 수줍어진다. 만년 억년 지질학적/지구적 시간감각에 압도당한다. 좀처럼 쓸 기회가 드문 우리말, ‘웅숭깊다.’라는 이례적 수사가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소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에게는 알프스의 색감이 푸른 산도 아니요 파란 물도 아닌 하얗디하얀 빙하로 남아있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 반짝반짝 작은 별이 빛나는 밤. 하얀 달빛을 머금고 하얀 별빛까지도 품었던 마터호른 산도 하얗게 빛이 났다. 그 빛나는 밤을 하얗게 지새우다 빙하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트는 새벽을 맞이했다. ‘빛을 보다.’, ‘관광’(觀光)이라는 단어가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장소는 지구상에 또 없을 것만 같았다.
2. 관광대국
철도대국은 관광대국의 초석이 되었다. 철길이 산길과 물길을 잇는 촉매가 되었다. 스위스의 동서남북으로 유럽인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세계인들의 눈길도 유독 쏠렸다. 유네스코 선정 3개의 자연유산과 8개의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나라가 스위스이다. 단숨에 세계 굴지의 관광대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이다. 객관적 지표가 관광업의 위상을 말해준다. GDP의 3%가 외국인들이 스위스를 방문하고 쓰고 간 돈이다. 2011년 다보스포럼이 발표한 여행 산업 경쟁력 보고서에도 스위스는 당당하게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항로와 육로의 인프라가 워낙 탄탄한데다가 안전과 청결 면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얻었다.
아무리 등산열차가 훌륭하다 한들, 창밖으로 바라만 보는 것으로는 나는 도저히 족할 수 없었다. 쓱 보고 셀카만 찍고 휙 돌아서는 여행은 애당초 체질에 맞지 않는다. 오죽하면 걸으면서 생각하는 사람, ‘로샤’(路思)가 부캐가 되었다. 타고난 방랑벽을 한껏 끌어올리는 장소이다. 알프스까지 왔는데, 두 발로 걸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걸어야 제 맛이다. 시각만이 아니라 후각과 촉각 등 오감을 모두 자극한다. 풍경 속으로 내가 빨리어 들어간다. 내가 풍경의 하나로 녹아내리어 간다. 불일불이(不一不二)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지경에 진입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스위스는 하염없이 마구 걷기에도 제격인 나라이다. 대자연을 만끽하며 하이킹하고 트래킹 할 수 있는 코스도 여럿 정비되어 있다. 전국 전역을 잇는 둘레길이 장장 6만 km에 달한다. 난이도도 다양하다. 아장아장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평이한 코스부터 전문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도전할 수 없는 험준한 코스까지 각양각색이다. 때와 곳이 어울리면 금상첨화인바, 내가 알프스를 걸은 시점은 마침 4월 하순이었다. 눈이 녹아내린 드넓은 초원에 풋풋한 야생화가 폭발적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웅장한 빙하와 짙푸른 숲에다 찬란한 햇빛이 반짝거리는 호수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였건만, 겨울을 뚫고 흐드러지게 만발한 들꽃까지 곁들이니 바로 여기가 지상천국, 도원경이구나 싶었다.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막 겨울 스키 시즌이 끝나던 무렵이었다. 한겨울이면 이 일대는 온통 스키부츠를 신은 사람을 뿐이라고 한다. 최고의 설질을 자랑하는 리조트에서 신나게 스키를 타고나면 따뜻한 스파로 몸을 녹인다. 스키와 스파로 노곤노곤해진 몸을 누이고 쉬어갈 호텔산업도 스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전국에 6000개에 육박하는 호텔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호텔리어들 사이에서는 레전드로 통하는 호텔왕 세자르 리츠를 배출한 나라가 바로 스위스이다. 굴지의 산업과 최상의 교육은 무관할 수 없는 바, 전국 각지에서 세계적 명성을 확보한 호텔 학교들이 미래의 호텔리어를 양성하고 있다. 역시나 유학생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글로벌 교육기관들이다.
물론 최정상급 호텔들만 즐비한 것도 아니다. 유스호스텔과 B&B 등 선택지 폭이 넓다. 에어비앤비에 접속하노라면 대자연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캠핑장부터 장기 체류형 홀리데이 아파트, 주민들 및 동물들과도 함께 생활해 볼 수 있는 팜스테이 등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초콜릿과 치즈를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도 눈에 띈다. 걷고 자고 먹고 마시는 그 어떤 방면으로도 남다르면서도 충실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관광대국 스위스의 진면모이다.
3. 환경 선진국
<유라시아 견문> 3년 내내 참으로 자주 비행기를 탔다. 어마어마하게 긴 탄소발자국을 남긴 것이다. 천일 유랑에는 한 점 후회가 없건만, 끝내 영 찜찜한 것은 여행이 수반하는 탄소 배출이다. 그나마 알프스 견문이 위안이었다면 마터호른의 발치에 자리한 체르마트가 대표적인 카프리(car-free) 청정 마을인 탓이다. 오래된 목조 가옥에 내부 인테리어만 새로 한 부티크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깜찍한 사이즈의 전기자동차가 부지런히 여기와 저기를 오가며 이곳과 저곳을 분주히 잇고 있었다. 생명을 살리는 생태마을, 21세기형 ‘새마을’이었던 셈이다.
‘빙하여 잘 있거라.’ 작별 인사는 극지방, 남극과 북극의 극단적 사례가 아니다. 유럽의 한복판, 알프스의 설산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설경이 갈수록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알프스 빙하의 거개도 스위스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 국토 면적의 3%가 얼음일 만큼 빙하대국이다. 그러나 년년세세 그 면적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150년 알프스 평균 기온은 1.5도 상승한 것으로 추정한다. 백 년 전에 견주어 빙하의 표면적은 20% 이상 줄었다. 6번째 대멸종을 거부하는 ‘멸종저항운동’은 자연물의 하나, 빙하에게도 해당되는 셈이다.
자연에 반하는 자동차부터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스위스는 배기가스 규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디젤 트럭 운송도 대폭 줄여가고 있다. 도로 대신에 철도를 활용하는 딜리버리 모빌리티 혁신을 꾀하고 있다. 이미 사방팔방, 사통팔달 깔려있는 철도를 십분 활용하여 사람만이 아니라 물자도 이동시킨다는 복안이다. 장기적으로 스위스 국내 물류의 7할까지도 철도가 소화하는 것이 목표란다. 실제로 스위스를 여행하노라면 도로보다 철도가 훨씬 편하게 구축되어 있다. 기차와 트램과 케이블카에 이르기까지 전국 6,300km의 철도 노선만 똘똘하게 활용하면 원하는 곳 어디든 쉽사리 도착할 수 있다. 통계상으로도 여타 유럽인들보다 스위스 사람들의 철도 이용 비율이 2배가 높다고 한다. 대부분의 기차역에서는 공용 자전거도 빌려준다. 자가용을 몰면서 별도로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도 쾌적하고 편리한 일상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만사에 음과 양이 함께 있다. 빙하가 녹아내려 더욱 풍부해진 수량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지난 세기에도 산악지대에 건설한 수력발전소가 국내 발전의 절반을 도맡았는데, 2012년 9월에 발표한 <에너지 전략 2050>을 보노라면 2050년까지 그 비중을 2/3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수력 이외의 신재생 에너지에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특히 태양광 발전을 확대하여 기왕에 3할을 소화했던 원자력의 비중을 대폭 낮춘다는 계획이다. 2011년 3.11 후쿠시마 사태 직후에 마련된 청사진인지라 원전은 더 이상 짓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자라는 에너지는 전국 30여개에 달하는 쓰레기 처리시설의 소각열을 이용해 벌충할 것이라고 한다.
물만큼이나 숲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삼림 자원이 원체 풍요로운 나라이다. 롤렉스를 비롯하여 그 유명한 스위스 시계 산업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의약품 수출이다. 내가 여행했던 2017년 통계로 의약품은 38%요, 시계는 9%이니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바이오 생명과학의 선진국이기도 한 바, 그 근간은 역시나 알프스가 품고 있는 그 생물다양성의 풍요로움에 있다 하겠다.
패시브하우스 등 에코건축 기술도 발군이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취리히와 베른이 선도하고 있는 ‘미너지’(미니멈 에너지) 생태건축이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열과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활용하여 1년 내내 건물 실온을 20도 안팎으로 유지한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만들고 여름에는 시원하도록 하는 순환 환기 시스템도 빼어나다. 바이오매스를 적극 활용한 에너지 보완책도 구비하고 있기에, 통상보다 높게 책정된 건축 비용일지라도 10년만 살면 충분히 회수될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살리고 지구도 살리는 생명살림건축의 전형인 바, 미너지 프로젝트의 장래 또한 밝은 편이라 하겠다. 이만하면 자연을 보존하는 에코(eco)는 물론이요 미래 산업을 개척하는 바이오(bio)에 스마트(smart) 건축까지, 글로벌 그린뉴딜을 선도하는 환경 선진국이자 생태 모범국으로 스위스를 꼽는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4. 강원도의 힘
하늘과 땅 사이 사람이 자리한다. 산과 강 사이 인간이 살아간다. 스위스가 매력적인 나라인 것은 역시나 화룡정점, 알프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생기가 넘치고 활기가 돋아나는 특유의 생생활활한 기운이 솟구친다. 가급적이면 지붕 아래서 머물기보다는 문을 박차고 나이가 하늘 아래서 오랜 시간을 머물고자 한다. 여가생활도 시청각을 자극하는 미디어 소비가 아니라, 온 몸을 다 쓰고 온 힘을 다 쏟는 야외 활동이 중심이다. 국토를 놀이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든 숲길로 곧장 이어지는 오솔길이 마련되어 있고, 계절에 상관없이 숲속 오두막집은 항상 성황이다. 장작불을 때지 않아도 되는 철이 되면 스키를 거두고 자전거를 꺼낸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산악자전거 대회 또한 일생에 한번쯤은 도전해 볼만한 정신적 쾌락과 육체적 쾌감을 선사한다.
강과 호수도 멀리서 바라만 보지 않는다. 곳곳에서 하얀 요트 돛이 나무처럼 뻗어 있고, 카누와 카약을 즐기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협곡을 지나거나 암벽을 타오르는 등 익스트림 스포츠도 활황이다. 팔뚝과 허벅지가 터져나갈 듯 심박수를 최고치로 올린 다음에는 첨벙첨벙 노천탕으로 뛰어든다. 뭍에서도 물에서도 ‘스웻 라이프’(sweat life)에 흠뻑 젖어들어 사는 것이다. 용병으로 징발되었던 왕년의 알프스 사나이(=산아이)들이 이제 유럽에서도 가장 건강하고 가장 행복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워너비’들이 된 것이다. 2H(Health & Happiness), 행복과 건강이라는 21세기 최고의 가치를 앞장서 솔선수범ㅎ고 있는 것이다.
자고로 20세기형 부국강병, 강성대국과 선군정치는 이미 후지고 낡은 레토릭이 되었다. 경제성장과의 병진정책 또한 따라잡기(catch up), 따라하기(follow up)의 반복에 그친다. 단숨에 단도직입으로 미래형 행복국가로 도약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행복한 마음과 건강한 몸이 곧 국가의 목표이자 국정의 지표가 되어야 한다. 산이 국토의 7할이 넘는 산악국가라는 점도 북조선이 스위스와 은근히 빼다 닮은 구석이다. 추운 겨울이 길다는 계절적 특성도 흡사하다. 김정은 위원장이 각별히 마식령 스키장 일대를 국제적 휴양지로 키우려는 발상 또한 스위스 경험과 아주 무관치는 않을 법하다. 다만 관광대국의 근간에 철도대국이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스위스만 해도 불과 일백년 전에야 철도대국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우후죽순 경쟁적으로 노선을 만들어가던 초기의 혼란을 거두고 스위스 연방철도로 통폐합되어갔던 저간의 시행착오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크다. 북조선은 처음부터 국영기업이 총대를 메고 국책사업으로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쪽이 이로울 것이다. 고속철도와 광역철도망으로 전국 전역을 사통팔달 전변시켜야 한다.
미국은 자동차 중심의 개인주의 사회인고로 고속도로가 교통의 중심이었다. 러시아는 집단적 전통이 유장한 고로 시베리아의 동서를 잇는 철도가 교통의 주축이었다. ‘한강의 기적’이 경부고속도로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북조선의 기약은 스마트 철도일 공산이 크다. 산악국가 북조선을 꼬부랑 고갯길로 꼬부랑꼬부랑 오고갈 것도 없다. 터널을 뚫고 산 아래로 달려가는 직선 거리의 철도가 산을 깎고 나무를 밀어 구불구불 도로를 만드는 일보다 훨씬 더 생태적이라는 연구 결과도 많다. 갈수록 비행기는 덜 타고, 자동차 운전은 최대한 줄여가야 할 것인바, 도로 중심의 교통체계를 구태여 시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린 모빌리티 생태계로 단번에 도약하는 차원에서도 방점은 스마트 철도에 찍혀야 할 것이다. 그레타 툰베리의 모국 스웨덴에서는 플뤼그스캄(flygskam)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비행기 여행의 수치심’이라는 뜻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단어가 바로 탁쉬그리트(tagskryt)이다. ‘기차 여행의 자부심’이다. 북조선은 회색국가, 잿빛국가를 통과의례처럼 겪을 것도 없이 적색국가에서 녹색국가로 단숨에 뛰어올라야 할 것이다. 스위스의 북쪽, 옛 동독 지역이 독일 환경산업의 메카로 탈바꿈했음도 유력하게 참조해 볼만하다.
북조선이 스위스보다 더 유리한 점도 있다. 내륙국가 스위스와 달리 북조선은 바다도 끼고 있다. 서해와 동해, 황해와 청해, 양해를 겸장한다. 아무리 호수가 크고 강이 넓다 한들 망망대해의 그 압도적인 공간감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다. 잔잔한 호반으로는 미처 채워지지 않는 거친 파도의 원초적인 매력도 대단하다. 서해는 남중국해를 지나 동남아에 가닿는다. 구름에서 비가 결빙되어 떨어지는 눈송이를 좀처럼 보기 힘든 더운 나라가 태반이다. 인도네시아 를 여행하던 무렵 우연히 한국에서 연수를 한 공직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 시절 가장 그리운 것이 한겨울 펑펑 내렸던 함박눈의 풍경이라 했다. 북조선의 그 긴긴 겨울, 한철 내내 녹지 않는 눈사람이 돈다발을 안겨다 줄지도 모르는 것이다. 동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면 남북아메리카와도 연결된다. 한국은 DMZ에 막혀 대륙과 직접 맞닿을 수 없는 반면에, 북조선은 바다를 통해 아라비아와 아메리카에 가닿을 수 있다. 북조선이야말로 대양과 대륙이, 구대륙과 신대륙이, 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가 만나는 접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일백년 전 가동되었던 크루즈 여행 코스이다. 유럽들이 알프스로 달려가던 바로 그 무렵에 미국인들은 캘리포니아에서 출항하는 크루즈를 타고 금강산(Diamond Mountain)에 당도했다. 그 중에서 특히 원산은 샌디에고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동태평양 연안도시의 핫트렌드가 곧장 전파되는 서태평양의 대표적인 글로벌 레저 도시였다. 한여름 서핑부터 한겨울 스키는 물론이요 일년 내내 스파도 즐길 수 있는 아시아의 관광천국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이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통하여 원산폭격으로 기반시절이 죄다 붕괴되면서 원산은 반세기가 넘도록 삼엄한 군사도시로 연명했다. 백 년 전 그 찬란했던 “아시아의 샌프란시스코”의 영화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완전범죄, 영원한 망각 또한 없는 법이다. 오랫동안 미국과 일본의 관광엽서를 수만 장 수집해온 지인의 컬렉션에서 태평양 횡단 크루즈 여행의 대미가 원산이었음을 수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15년이 흘렀건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과거사의 자료이자 미래산업의 원료이다.
금강산만큼이나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산으로 자강도의 오가산을 꼽고 싶다. 강원도 인제군의 향로봉이 북과 남의 식물이 만나는 남북 생태계의 접경지대라면, 오가산은 유라시아와 북조선의 생태계, 대륙과 반도의 동물과 식물이 교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산악인들과 아웃도어 브랜드를 오가산으로 초청해서 산림 엑스포를 열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년에 강원도에서는 ‘세계 산림 엑스포’가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국내를 대표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의 강태선 회장이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그러고 보면 강원도의 힘 또한 산에서 나온다. 도 면적의 8할이 온통 산이다. 그리고 그 산맥은 남과 북을 가르지 않고 유유하게 흐르고 유려하게 춤춘다. 설악산부터 금강산까지가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세를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만은 아닐 듯하다. 더군다나 강원도는 지자체 가운데 유일무이 남강원도와 북강원도로 나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강원 세계 산림 엑스포”라고 하니, 남강원도만 홀로 진행할 것도 없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 중단 13년차, 사람 사이가 아직도 서먹하다면 산부터 이어가는 편이 이로울 것이다. 이 땅 한반도는 애당초 북조선 인민과 남한 국민, 한민족만 살아가는 터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피엔스 이전부터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가야 할 보금자리이다. 산길과 강길과 바닷길부터 먼저 잇고, 동물과 식물과 미물을 다시 연결시키고, 끝끝내는 갈라지고 쪼개졌던 사람들의 응어리진 마음도 차근차근 차차 풀어갈 일이다.
그렇다면 강원도를 ‘한반도의 알프스’라고 빗댈 수 있을까? 유럽에서 스위스가 했던 중계와 중재와 중립의 역할을 한반도에서는 강원도가 감당해볼 수 있을까? 강원도 역시도 문자 그대로 ‘강의 원천’(江原), 산골이 깊어서 물길이 출발한 땅이다. 스위스에서도 산길과 물길을 이은 것은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낸 철길이었던 바, 동해북부선, 남북열차사업의 핵심도 남북강원도와 남북고성을 통과한다. 스위스가 자랑하는 그 특급 산악열차로 강원도의 북과 남을 촘촘히 튼튼히 묶고 엮어서, 찬찬히 음미해 볼 수 있는 관광열차를 만들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금강산부터 설악산은 물론이요 넘실대는 동해의 풍랑까지 통유리로 감상할 수 있다면 세계적인 관광객을 (다시) 끌어 모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백년만의 재개장인고로, 이번에는 태평양 횡단 크루즈에 족할 것도 없을 것이다. 아메리카는 물론이요 인도네시아와 인디아와 아라비아와 유라시아까지 만국의 만인을 두 팔 벌려 환대하고 싶다. 부디 북과 남의 강원도를 한통속으로 접근하여 동북아의 스위스로 가꾸어 나가보자. 스마트뉴딜과 그린뉴딜과 로컬뉴딜에 남북뉴딜까지 장착한 글로벌 K-뉴딜의 생생활활한 실험장이 될 수 있다.
하필이면 김정은이 나고 자란 고향 또한 북강원도의 중심, 원산이었음이 예사롭지 않다. 원산부터 춘천을 지나 원주까지, 설악산부터 DMZ를 지나 금강산까지. 북강원과 남강원을 두루 망라하여 치산치수에 정성을 쏟고 치심(治心)까지도 만전을 다하는 큰 정치가로서 실력을 쌓아가길 바란다. 2022년 5월이면 한국에서도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다. 바로 그 달, 한 해 가운데 가장 찬란하다는 계절의 여왕 5월에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열리는 강원 세계 산림 엑스포가 ‘남북생명공동체’의 비전을 온 누리에 표방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가 되어줄 것이다. 한번은 금강산에서, 또 한 번은 설악산에서, 마지막으로는 DMZ에서, 세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연달아 열어볼 수도 있다. 내년 세계 산림 엑스포의 주제가 “세계-인류의 미래, 산림에서 찾는다.”라고 한다. 살짝 비틀어 “북조선의 미래 - 한반도의 알프스, 남북 강원도에서 찾는다.”라고 속닥속닥 귀뜸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