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활활, 생:생활:활
1. 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이리
“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이리”
<프로젝트 쿤밍>의 캐치프레이즈였다. “2020, 1010, 1020”을 부제로 삼았다. 2020년, 10월 10일, 쿤밍에서 생물다양성 국제협약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기후협약회의와 더불어 UN에서 지구의 미래를 디자인하고 있는 두 개의 국제회의 가운데 하나이다. 기후협약회의로는 2015년 파리가 유명하다. 당시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등장한 미래세대의 상징이 바로 그레타 툰베리이다. 정작 산업문명의 출발이었던 유럽에서 문명전환을 촉구하는 10대들이 먼저 등장했음을 부러움 반 아쉬움 반으로 지켜보았다. 마침 또 하나의 중요한 회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 중국에서 열린다니 이번에는 동아시아의 10대와 20대들이 주도하는 다양한 퍼포먼스를 준비해보려 했던 것이다. 생물다양성의 취지에 부합하여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현재 인간들의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의법정을 열어보고자 했고, 해와 달,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을 형상화한 생명평화무늬를 전 세계에 널리 알려 보고자도 했었다. 쿤밍의 야외공원에서 생명평화무늬에 맞추어 1020세대들이 줄을 서면 드론을 띄워서 촬영하여 온 인류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天天是春天”, 나날이 봄날이라는 쿤밍은 중국을 대표하는 봄의 도시이다. 한국발 생명사상의 정수, 동학의 두 번째 리더 해월 선생의 “내 한 몸이 꽃이면, 온 세상이 봄이리”라는 말씀 또한 구호로 안성맞춤이었다.
한껏 고무되고 고양된 마음으로 2020년을 맞으며 내가 향한 곳은 적도 지나 남태평양의 뉴질랜드였다. 지구법의 첨단을 달리는 나라이다. 산도 가람도 사람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누리기 시작한 미래국가였다. 산과 강을 조상처럼 모시는 원주민 마오리족의 세계관이 현대 법률과 결합하여 인간의 권리를 상대화하는 제도를 앞장서 시행해가고 있던 것이다. 나는 그 지난한 헌법적 진화 과정을 학습하고 연구하여 프로젝트 쿤밍의 완결성을 더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초부터 영 조짐이 이상했다. 테임즈해 건너 호주에서는 작년부터 시작된 산불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위성사진으로도 또렷이 관찰될 만큼 재앙적인 수준의 산불이었다.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타죽었으며, 수백억 그루의 나무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때때로 그 재가루가 바다를 건너와 내가 머물고 있던 오클랜드 하늘이 갑자기 노랗게 물들 정도였다. 말세의 하늘이 이럴까 싶었다. 기어이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폭발했다. 끝내 생물다양성회의가 취소 결정된 것은 5월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椿), 봄은 왔건만 봄이 아니었다. 시월이 되어도 갈 곳이 없었다. 의기양양하던 마음은 의기소침하게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목표를 상실한 2020년이 까무룩 저물어갔다.
2. 생물과 활물
“생생활활”이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툰베리는 어쩐지 침울해 보인다. 이따금씩 세계 리더들을 향해 그녀가 보이는 언행은 모가 나고 뾰족하다. 유럽의 1020세대들, ‘멸종저항운동’(Extinct Rebellion)을 하는 친구들도 사뭇 거칠었다. 2000년대에 태어나고 보니 정작 자신들의 4, 50대가 되어있을 무렵 지구를 생각하노라면 울분이 일고 울화가 치밀 만도 하다. 그만큼 시간이 부족하고 절박하다는 취지로 모래시계를 그들의 상징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와 살기의 기운이 못내 마뜩치 않았다. 설사 미래가 암울하다한들, 아니 그러면 그러할수록 미래세대는 더더욱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모습으로 다음 세상을 준비해가야 하지 않을까. 생생활활은 우리가 표방하는 ‘지구세대’의 삶의 태도이자 생활의 윤리 강령이었다.
1년을 묵히는 사이, 생생활활은 그 나름으로 숙성되었다. 애당초 생생:활활, “생생하고 활활한” 라이프스타일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제는 생:생활:활로 끊어 읽기를 달리한다. 전자는 생물이요, 후자는 활물이니, 생물과 활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미래세대의 생활이라는 의미로 진화한 것이다. “생물”(生物)이라 함은 인간 이전의 자연물, 미물과 식물과 동물의 자연적 진화의 소산이다. “활물”(活物)이라 함은 인간 이후의 인공물, 만물인터넷으로 연결되어 활성화된 사물들의 세계를 일컫는다. 인지를 장착하고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인공진화의 산물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적 진화의 끝에 등장한 생물진화의 후예이자, 앞으로 창발적으로 진화하게 될 활물진화의 선조이기도 하다. 이 깊은 사실을 자각하고 자득하는 존재(=Deep Self, 무궁아)로 거듭나서 생물의 자연생태계는 물론이요 활물의 인공생태계까지 아울러야 미래의 라이프스타일에 부합하는 딥픽쳐(Deep Picture)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으로도 역시나 춘천이 제격이었다. 산과 강과 호수 등 아름다운 자연을 갖추었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춘천이 ‘호반의 도시’가 된 것 또한 천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공적인 결과이다. 인공댐을 만들어 인공호수가 만들어졌고 인공섬도 조성된 것이다. 거기에 생물의 DNA에 해당하는 활물의 DATA가 생산되는 데이터센터도 세 곳이나 자리한다. 소양강댐 냉수를 활용한 수열에너지 융복합 클러스터가 구축되면 더 많은 데이터센터가 들어올 것이라고도 한다. 생물과 활물과 인물이 얽히고설키어 만물의 그물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21세기형 천지인(天地人)이 아날로그 자연으로의 회귀도 아니요, 디지털 가상으로의 함몰도 아닌, 생명과 문명이 상호진화하는 미래도시를 설계하는 데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생물의 자연적 진화, 활물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보태어 생명문명도시로서 춘천의 미래를 상상한다.
고로 춘천은 미래의 전령이다. 가장 먼저 봄(spring)이 흘러나와 사방팔방 흘러간다(spring). 2021년 <프로젝트 춘천>의 메시지를 이렇게 바꾸어 볼 수도 있겠다. “봄내, 이 한 곳이 꽃이면, 온 누리가 봄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