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DEMOCRACY : 문명개화에서 신문명개벽으로
1. 유라시아 견문 : 개화에서 개벽으로
유라시아를 천일 간 유랑했다. 유럽과 아시아가 다시 합류하고 고전과 미래가 소통하는 21세기의 포스트모던한 진풍경을 두 눈에 담고 두 발로 누비고 싶었다. 귀로에 접어들며 뜻밖의 결론에 이르렀다. 서구적 근대가 산출한 겹겹의 분단체제의 심층에 성(聖)과 속(俗)의 분단체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천상과 지상의 분단체제라고도 하겠다. 자연과 자유의 분화라고도 하겠다. 속이 성을 압도했다. 지상의 논리가 천상의 도리를 압살했다. 자유가 자연에 압승을 거두었다.
그 근대화=세속화의 교조주의가 곳곳에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성과 속이 다시 합류하고 있는 모습을 도처에서 목격했다. 언젠가부터 ‘성속합작’(聖俗合作)이라고 말을 즐겨 쓰게 된 연유이다. 탈서구적 세계화, 지구적 근대(Global Modernity)의 정수였다. 허나 탈세속화의 끝이 비단 종교의 귀환이 아니었음이 백미이다. 기성종교가 축적한 문명적 자산이 대안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업데이트되고 업그레이드되고 있었다. 그래서 ‘재영성화’라고 표현한다. 특정계급만 향유하던 일상을 한층 성스럽게 영위하는 삶의 기술이 대중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삶의 양식의 추구가 ‘새 정치’도 추동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2.0’, 권리(權利)의 민주화에서 천리(天理)의 민주화로 이행하고 있다
2019년을 맞이하여 <개벽파 선언>을 통하여 사상사의 졸가리를 새로이 세우려 하고 있다. 선생님과 선배님들이 서술한 한국근현대사는 한마디로 ‘개화사’이다. 문명개화, 서구적 근대로 향해 진보하는 150년사를 뼈대로 삼고 있다. 심지어 그에 기초하여 1,500년 과거사도 기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좌/우와 진보/보수가 크게 다르지 않다. 한쪽은 식민지 근대화와 개발독재의 성취를 높이 치고, 다른 쪽은 항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가치를 높게 산다. 그러나 심급에서 ‘탈아입구’(脫亞入毆)의 대서사는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지구사의 대반전을 맞춤하여 ‘개벽사’(開闢史)를 새로이 쓰고 싶다.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150년사를 통으로 갈아엎고 싶다.
개벽사의 서술은 개벽학의 수립으로 나아갈 것이다. 현재의 대학은 개화학교이다. 학과체제부터 커리큘럼까지 온통 개화독재이다. 절절하게, 열렬하게 개벽대학을 염원한다. 그리고 새 학파의 등장은 새 정파 탄생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개벽파를 규합하고 개벽당의 출범까지 내다본다. 물론 서두를 이유는 조금도 없다. 철학이 부재한 새 정당과 새 정치의 좌초를 이미 숱하게 목도한 터이다. 정당보다 시급한 것이 학당이다. 공교육 학교와 사교육 학원 사이, 학당의 새 길을 모색한다. 공/사로 나뉘되 학교와 학원 또한 일백년 개화의 관성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응당 개벽학당의 기치를 높이 들어야 할 것이다. 개벽사의 서술, 개벽학의 수립, 개벽파의 규합, 개벽당의 출범, 그리하여 끝내 개벽국가의 탄생을 목도하고 싶다.
미리 오해는 피하고 싶다. 개벽이 개화를 능가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개화와 개벽의 대합장/대합창을 도모한다. 서방학과 동방학을 회통한 신동학을 추구한다. 천주(天主)와 천하(天下)와 천도(天道)가 융합하는 다시 개벽을 소망한다. 해원상생(解寃相生), 일방의 승리가 아니라 쌍방의 조화를 탐색한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 남긴 방명록 문구이다. ‘개화에서 개벽으로’야말로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에 딱 어울리는 화두라고 생각한다. 맹목적 척사로 치달았던 북조선과 맹종적 개화로 내달렸던 남한이 다시 어울어지는 최선의 방편 또한 양쪽에서 공히 잊히고 잃어버린 개벽파를 더불어 재건해가는 데 있다고 여긴다. 2019년을 개벽파 재건의 원년으로 삼는다.
민주화 다음의 역사적 단계로 “개벽화”를 제시하는 것이다. 비로소 촛불 이후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1987년 이후의 출로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하다. 산업화는 개화의 전반전이요, 민주화는 개화의 후반전일 따름이었다. 게임오버, 구시대의 막이 진즉에 내린 것입니다. 박근혜 정권은 산업화 세력의 앵콜이요, 문재인 정권은 민주화 세대의 커튼콜이다. 하기에 개발파와 개혁파의 저 아웅다웅이 신물이 나도록 지겨웁다. 개화우파와 개화좌파의 ‘적대적 공존’이 진물이 날만큼 지긋지긋하다. 서둘러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프레임을 바꾸어야 하겠다.
2. 3.1 백돌 : 시대유감
현재 ‘근대문화유산’ 하면 대체로 일제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인 경우가 많다. 개화사로 근대사를 썼기에 부지불식간 일본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요사이 떠들썩했던 목포 또한 마찬가지다. 비단 목포뿐일까. 군산도 부산도 인천도 개항과 개화의 유산만 부각되어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 개항을 시발로 삼는 ‘개화기’라는 시대구분 탓이다. 서둘러 1860년 동학 창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개벽기’라는 시대인식을 바로 세워야하겠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장을 기초한 인물이 조소앙이었다. 그리고 그 첫 문장은 “신인일치(神人一致)로 중외협응하야 한성에 기의한지 삼십유일……”이라고 시작된다. 서울에서 기의한 3.1운동을 “신인일치”의 소산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첫 문장의 첫 단어가 “신인”, 호모 데우스(Homo Deus)였다. 독립선언서에 이어 임시정부 헌장 또한 영성적 메타포로 그득하고 그윽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좀처럼 개화좌파 지식인들의 눈에는 저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추적할 의욕이 솟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해방 이후의 분단체제를 소급 적용하여 좌우통합을 위한 사상운동의 단서를 3.1운동에서 추출해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러한 세속주의 일방의 역사인식은 민주화 세대들이 주축이 된 현 정부의 3.1절 기념사에서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하루 전 하노이 발 악재에 기념사를 급히 수정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범박한 문장으로 연속된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직접 유관순을 거론한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등급을 높여 건국훈장까지 수여한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헛발 짓이다. 미투(Me Too) 시대, 그간의 3.1운동사에서 조명을 덜 받은 여성을 드높이는 것이라고 우기기에도 겸연쩍은 패착이다. 항일 민족주의라는 남성 서사에 민족 소녀의 아이콘으로 소비해 버리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덕후’라는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음에도 쌍팔년도 NL식의 그 후진 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태 친일과 항일, 좌와 우, 20세기의 논리를 반복하고 복제하고 있을 뿐이다. 세속 정치인의 언설도 기성 지식인의 담론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3.1혁명 백돌이었다. 진보/보수를 망라하여 세속화를 향해 질주했던 백년의 급진에서 전혀 탈피하지 못한 형국이다.
아울러 삼일혁명 백돌에 친일 잔재 청산만 운운해서는 한가로운 일이다. 일백년 전에도 일본의 뒷배는 미국이었다. 제2의 동학운동, 다시 개벽 운동이 좌초한 데에도 그 심급에는 전후 세계의 리더로 부상한 미국이 자리했었다. 1945년 해방 이후는 더 말할 것도 없겠다. 1860년 중국으로부터 사상적 독립을 감행한 것처럼, 1919년 일본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선언했던 것처럼, 2019년에는 필히 ‘개화의 지존’ 미국으로부터의 자립과 자주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겠다. 딴청을 피우는 미국에 연연하여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에 연동시킬 것이 아니라, 남북이 선도하고 중국과 러시아가 협조함으로써 미국과 일본을 견인하는 ‘새로운 길’을 탐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시아 퍼스트, 아메리카 라스트, 그편이 목하 개창되고 있는 포스트-웨스트, 포스트-아메리카, 유라시아의 세기와도 정합적이다.
3. 개벽사의 등뼈 : 동학혁명, 삼일혁명, 촛불혁명
조선은 이미 1860년 동학 창도 이래 중국으로부터 사상적 독립을 완수했다. 독립문이 그 물질적 기표라면, ‘동학’이라는 말은 그 사상적 기호였다. 따라서 기미년 3.1혁명 또한 포스트-동학의 장기 지속적 지평에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동학혁명의 환생이 3.1혁명이었던 것이다. 다시 개벽의 부활절이 바로 3.1절이었다. 고로 ‘개벽절’이라 고쳐 부른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정명(正名)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개화파(일본)과 척사파(조선왕조)의 협공에 처절하게/철저하게 패배했던 동학몽(夢)이 다시금 그 거대한 뿌리를 역사의 전면에 드러냈던 것이다.
와신상담 반세기를 거치며 동학은 더더욱 단련되고 진화했다. 도전(道戰), 언전(言戰), 재전(財戰)을 태비한 손병희의 <준비시대>부터 이미 동학 2.0, 다시 개벽과 ‘도의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철저한 비폭력운동으로 대안 문명으로서의 합법성을 쟁취한다. 서학을 거부하고 유학에 도전하며 동학만을 고수하는 배타성도 떨쳐냈다. 서학과의 합작에도 앞장섰다. 개화를 배타하지 않고 개벽과 개화의 공진화를 꾀했다. 천도교가 선봉에 서되 기독교도 더불어 가는 득의의 지혜를 발휘한다. 불교와 유교도 폭넓게 아우르고자 품을 넓혔다. 3.1운동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동서종교 화해운동, 동서문명 회통운동으로서 세계사적 장관을 연출할 수 있었던 기저이다. 기미독립선언서가 일제에 맞선 일국의 민족주의 선언이 아니라, 신문명 건설을 촉구하는 온누리와 만천하의 헌장으로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완미하고 완숙한 까닭이다.
무엇보다 3.1을 전후로 한 개벽파의 공화국 담론이 탁월하다. 최근 오상준이 지은 <초등교서(初等敎書)>(1907)를 탄복하며 읽어갔다. 세속적 정치문명과 영성적 종교문명을 무 자르듯 가르지 않는다. 성과 속의 공진화를 통한 도덕문명을 궁리한다. <초등교서>에서 모색하는 공화국은 천인(天人) 정신에 입각한 합의체이다. 천인의 마음을 통한 사회의 영성화를 지향한다. 천인은 요즘말로 ‘호모 데우스’라 고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데우스의 집합의지와 집합행동으로 만들어가는 공화국, 지상의 천국을 염원한 것이다. 따라서 인권이 아니라 ‘천권’(天權)이라 명명했다. 응당 천부인권과도 발상이 다르다. 인권은 그저 신으로부터 소여된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늘과 하나로 합일된 사람, 그 천격(天格)을 이룬 천인으로서 천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부단한 인성 도야로 천성(天性)을 발현할 것을 당부하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공화국 인민의 의무라고 하겠다. 응당 인격을 천격에 부합하도록 부단하게 수양하고 수행하고 수련해야 한다. 인격을 끊임없이 고양하는 근본적인 정치운동이자 근원적인 영성운동이었던 것이다. 고로 천직(天職)이라 함은 곧 천성을 따르는 삶이라고도 하겠다. 그래야 이 세계는 천계(天界)가 될 것이요, 온누리 만인은 천인(天人)이요, 온천하 만물은 천물(天物)이 된다. 그래야만 개별나라들 또한 국격을 드높여 천국(天國)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래야만이 비로소 태평천국의 인류운명공동체, 태평천하도 완수될 수 있다. 하나님/한울님/하느님/하는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다시 개벽과 다시 천하의 상호진화가 영구혁명과 영구평화의 첩경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천인공화국의 발상에 앞으로 우리가 모색해야 할 다종다양한 ‘제도개벽’의 단서 또한 무궁무진 담겨 있지 않나 생각한다.
실제로 백범 김구가 환국했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손병희 선생의 묘소였다고 한다. 백범과 의암도 동학으로 연결된다. 수운처럼 해월처럼 49일 기도를 통하여 제2의 동학운동으로서 3.1운동을 기획한 이가 의암이었다. 서로 소 닭 보듯 서먹하고 멀찍했던 서학과 동학의 연대, 천주와 천도의 연합을 꾀한 이가 의암이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세속을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영성으로 형질 전환시키고자 한 이 또한 의암이었다. 그래서 도심과 신심과 불심이 조화를 이루어 삼위일체 삼일운동에 이를 수 있었다. 정치인이자 종교인이었으니 ‘정치적 영성’으로 성성했던 인물이 바로 의암이다. 1894년에는 동학혁명의 북접 통령으로 활약하고,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과 1905년의 천도교 개편을 주도했으며, 1919년 3.1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 끝에 돌아가셨으니 ‘순교’이자 ‘순국’이기도 했던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를 잇는 ‘개벽사’의 적통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개벽파의 롤 모델로서도 적임자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실현한 성/속 겸장의 영성적 정치인이었다.
물론 천도교만 돌출했던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협동과 합작이 아니었더라면 3.1운동이 대혁명의 수준으로까지 확산되고 심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3.1로 말미암아 외래 종교였던 기독교는 비로소 토착화되고 민족화되고 민중화되었다. 일국의 독립운동이 아니라 만국의 살림운동으로 도약하는 데도 기독교의 참여는 혁혁한 공헌을 했다. 나라의 안과 밖으로 촘촘한 교회 조직과 선교사들의 협력으로 ‘언전’(言戰)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이요 미주와 구주에도 일파만파 파동을 일으키며 1919년 세계사의 대장관을 연출했다. 가히 하나님과 한울님이 함께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만만세였다. 이로써 조선은 동양의 일원에서 세계의 일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동양문명의 일부에서 동서양문명을 회통하는 세계문명의 일원으로 비약한 것이다. 다종교연합, 다문명융합의 3.1정신은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정식을 모색하는 오늘날에도 무궁하고 무진한 영감을 제공한다.
4. 가지 못한 길 : 동서회통, 고금융통, 성속합작
동학혁명(1894)에 이어 삼일혁명(1919)도 끝내 좌초한다. 한성을 지운 경성은 식민지 근대성으로 휘황한 개화도시의 아성으로 변모한다. 기어코 삼세판의 기회가 열린 것이 1945년이다. 도둑처럼 해방이 왔다. 광복(光復), 빛을 되찾아야 했다. 서둘러 조직을 재건한 것이 청우당(1946)이다. 동학의 이상세계를 세속에서 구현하는 전위정당이라고 하겠다. 이제야 비로소 동학이 표방한 개벽국가 건설의 적기가 열리는 듯 보였다. 과연 청우당은 해방공간 남(접)과 북(접)을 잇고 엮는 범한반도적 연합정당으로서 매우 인상적인 행보를 보였다. 20세기 후반에 제출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개화좌파에 기울었다. 21세기 초엽에 등장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뉴라이트, 개화우파에 치우쳤다. <해방공간의 재재인식>을 위해서라도 남/북과 좌/우와는 별개의 접근이 긴요하다.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고자 했던 성-속 합작의 청우당(靑友黨) 연구가 유력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북과 남에 모두 걸쳐있으면서도 남한과 북조선으로 흡수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건설 구상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북접 2.0, 북조선 청우당이 이채롭다. 2월 8일에 창당했다. 자부심이 남달랐다. 항일운동의 원조이자 적통을 자처했다. 1946년 창당의 뿌리 또한 1860년 동학 창건에 두고 있었다. 유학국가에서 동학국가로, 자그마치 86년간 축적된 경험에 바탕하여 새 나라 만들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신생정당들과는 족보가 달랐던 것이다. 과연 삽시간에 30만에 육박하는 당원을 확보한다. 소련을 등에 업은 북조선 노동당에 못지않았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사회주의에도 어깃장을 놓았다. 유물적 경제만으로는 이상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히 정신개벽이 수반되어야 하노라 역설했다. 고로 북조선에서 노동당과 청우당은 협력하면서도 경쟁하는 미묘한 관계였다. 미국식 자본독재를 비난함은 물론이요 소련식 무산독재도 비판했기 때문이다. ‘조선적 신민주주의’ 국가를 선창했다. 서구형 민주와 동구형 민주가 아닌 동방형 민주, 개벽민주의 깃발을 휘날린 것이다.
김일성이 아무리 항일무장투쟁에 열성이었다 한들 동학의 후예를 자임하는 청우당에 비하면 역사와 연륜이 모자랐다. 게다가 ‘왜놈’을 대신한 또 다른 외세 ‘로씨야’의 뒷배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었다. 친일파 개화우파를 이어 친소파 개화좌파로 이행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청우당이 주창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는 좌우합작에 그치지 않았다. 개화의 지존인 미국과 북방의 신중화로 등극한 소련이 융합하는 창조적 공간으로 한반도를 환골탈태시키는 지정학적, 지리문명적 구상력을 내장했던 것이다. 북접 2.0(북조선 청우당)과 남접2.0(한국 청우당)을 아울러서 한반도를 아메리카와 유라시아의 허브로 전변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기획한 것이 ‘3.1재현운동’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틀어지고 남북 분단이 굳어져 가던 1948년의 3.1절에 1919년의 3.1혁명을 재연시키고자 했다. 북과 남의 청우당이 합작하고 남과 북의 민중들이 연합하여 다시 3.1운동, 또 다시 개벽운동을 일으킬 것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선이 복잡하고 다기했다. 1919년처럼 다종교연합으로 대연정을 연출할 수 있을 만큼의 통일전선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도리어 소련에 아부하고 미국에 굴종하는 내부의 기생 세력들이 세를 키워 갔다. 1948년 꾀했던 ‘다시 3.1운동’의 실패는 청우당의 쇠락에도 결정적인 사태였다. 노동당의 수장 김일성이 직접 청우당의 ‘우파’들에 대한 숙청과 축출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레닌보다 수운 최제우를 높이 치는 청우당은 눈엣가시였다. 모스크바와 스탈린의 역린을 건드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청우당은 북조선 내 통일전선의 파트너(友黨)에서 노동당의 어용, 관제야당으로 강등된다. ‘조선적 신민주주의’가 만개하지 못함으로써 소련의 아류, 일당독재국가로 귀착된 것이다.
분단체제는 거울상으로 작동한다. 남쪽의 청우당 또한 쪼그라들었다. 무엇보다 조직의 성격 자체가 변질된다. 수양과 경세를 겸장했던 교정쌍전(敎政雙全)은 온간 데 없이 사라진다. 남북분단, 좌우분열의 난세 속에서 종교적 수행 운동으로 퇴각해 버린 것이다. 대승을 버리고 소승에 귀의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개화우파의 적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면서 개벽파는 역사의 최전선에서 퇴각해 버린다. 1960년, 동학 창도 100년을 맞춤한 4월 혁명 4.19에서도 천도교의 공헌은 미미했다. 오히려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되었던 유림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최후의 일격은 역시 한국전쟁이다. 해방이 개벽파의 기사회생이 아니라 치명타를 가하고 치명상을 남기게 된 것도 한국전쟁 탓이다. 북에서는 개화좌파가 득세하고 남에서는 개화우파가 득의양양하게 된다. 고로 분단체제의 심급 또한 단순히 남북분단과 좌우분열에 그치지 않는다. 동학으로 싹틔운 자생적이고 자각적인 근대에 결정적인 사망 선고를 내린 격이다. 남북을 막론하고 좌우를 망라하여 세속화 일방으로 일주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각기 서구형과 동구형의 ‘조국 근대화’로 내달렸던 것이다. 그 조국은 1894년과 1919년에 염원했던 ‘나의 소원’, 동학국가와 개벽국가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내발적 이상향과 실제로 구현된 (분단)국가의 실상 간에 아득한 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분단체제의 알파이요 오메가이다. 그러하다면 2019년 <개벽파 선언> 연재가 시작되었다 함은, 비로소 분단체제가 최종적 해체 국면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상징적 징후인지도 모르겠다.
개벽은 목하 한국은 물론이요 전 인류에게 임박한 ‘6번째 대멸종’을 돌파할 수 있는 파상력(破狀力)을 담지하고 있다. 나는 그 동안의 근대 논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오늘날의 세계는 1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점에 수긍한다. 단지 산업혁명을 통하여 유럽과 아시아 간 대분기가 일어났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혁명의 심층은 지상(地上)과 지하(地下)를 결합시킨 데 있다. 땅 아래 묻혀 있던 석탄과 석유를 마구 퍼다 썼다. 지하자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면서 지상자원에만 의존하던 기존의 인류문명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인류는 이제 대기에는 이산화탄소를 배출시키고, 대지에는 질소를 누적시킴으로써 대양의 구성 비율까지 바꾸어내었다. 2019년의 대기와 대지와 대양은 오롯이 인간이 만든 것이다. 46억년 지구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고작 200년 사이의 변화이다. 인간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변화시키고 동식물의 진화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1945년 이후 제3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근대화(산업화+민주화)로 내달리면서 이 지구적 변화의 속도는 더욱 가팔라졌다. 대기와 대지와 대양의 지구적 운동이 천상(天上)의 기후를 형성한다. 그 기후가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상경보등이 울려 퍼진지도 이미 오래이다. 그리하여 ‘인류세’(Anthropocene)라고 하는 지질학적 시대구분마저 등장한 것이다.
내가 보건대 산업화를 추동했던 개화우파는 물론이요, 민주화를 추진했던 개화좌파도 이 임박한 지구적 위기에 대한 근본인식과 근본대책이 없다. 시대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고작 다음 선거의 승리를 위하여 경기부양에 안달할 뿐이다. 그래서 답답하고 갑갑한 것이다. 1987년 이후 돌림노래가 30년이 넘도록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즉 민주화세력 또한 이미 기득권이다. 정체되고 적체되어 있다. 내가 스무 살 새내기 때 집권했던 세력이 마흔 살 대학교수가 되어서 재집권한 것이 ‘진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성찰이 부재하니 ‘20년 집권론’이라는 허언도 나오는 것이다. 한 세대도 모자라 반세기를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 정부는 촛불혁명의 수혜자일 뿐이다. 어부지리였다. 그런데도 제 분수를 모른다. 도무지 ‘구시대의 막내’라는 자각이 없다.
지구사의 시야에서 인간을 숙고하기에 현재의 민주주의 또한 숙고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재를 점유하고 있는 일국의 인간들만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지구를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의 ‘주권’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근대적인 정치제도가 인류의 대멸종을 앞당기고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조건과 운명을 생명적 차원에서 지질학적 역사에서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한다. 하여 ‘정신개벽’ 이후의 제도가 기성의 시장이나 국가에 안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장과 국가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심층적 현실까지 가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심층적 현실은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체제나 이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의 지평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개벽적 개안(開眼)”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그 심층 민주주의에서 ‘공공영역’은 인간과 인간 사이만 가리키지 않는다. 사람과 사물, 만물 사이의 공공영역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적 공공공간”이라고 세련되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이 세계에는 이미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물까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물과 미생물과 무생물과 인공물까지 만물이 활물(活物)로 연결되는 울트라 하이퍼 네트워크 시대가 개막하고 있다. 이들을 공히 ‘행위자’로서 모시고 ‘주권자’로서 섬기는 새로운 민주주의가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목하 21세기 동아시아의 변화를 추동하는 진원지는 한반도이다. 천하대란을 태평천하로 반전시키는 이행의 허브 또한 우리가 터한 바로 이곳이다. 지난 40년 중국의 개혁개방이 세계체제를 격변시켰다면, 앞으로 40년은 북조선의 개혁개방이 그 못지않은 파장을 일으킬 것이다. 한반도의 북쪽과 동북3성과 동몽골과 동시베리아가 물질개벽의 최전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과 중국의 20세기형 ‘근대화’ 노선을 복제해서는 천만만만 아니 될 것이다. 한국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명개화에서 신문명개벽으로의 대반전을 우리부턴 앞장서야 한다. 개화학에서 개벽학으로의 대전환을 우리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생명(生命)을 곧 혁명(革命)이자 천명(天命)으로 삼는 신문명을 창조하고 개창해야 한다. 생명을 생각하는 생활을 생산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5. 동학국가
요즘 쓰라린 마음으로 청우당의 ‘가지 못한 길’을 쓸어 담고 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심정으로 그 실패와 좌절의 처절한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있다. 시대를 앞서갔다. 20세기에서 21세기를 먼저 살았다. 때가 맞지 않았다. 이제야 때가 무르익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소련은 진즉에 제풀에 무너졌다. 미국도 돌이킬 수 없는 하강세에 접어들었다. 무엇보다 세속주의 일방의 근대화가 한계점에 다다랐다. 탈세속화와 재영성화의 메가트렌드가 유라시아 도처에서 도저하게 펼쳐지고 있다. ‘정치적 영성’으로 성성했던, ‘성속합작’의 원조였던 청우당을 꼼꼼하게 복기하려는 까닭이다.
1946년 8월 1일부터 <개벽신보>(開闢新報)라는 당 기관지를 주간으로 발행했다. 1948년 4월 1일부터는 일간지로 발간했다. 1919년 3.1혁명이 <개벽>(1920)을 낳았고, 1945년 해방이 <개벽신보>(1946)로 이어졌던 것이다. 허나 천도교중앙도서관과 독립운동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 자문을 구해도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한다. 해방공간의 ‘가지 못한 길’, ‘개벽하러 가는 길’을 복원해 내고 싶다. 올 여름방학은 모스크바에서 지내기로 결정했다. 소련군이 수합했던 북조선 문서고를 샅샅이 뒤져보아야 하겠다. 21세기에는 가볼 만한 길일 것이다. 아니, 가야 할 길일 터이다. 개벽로(開闢路)야말로 지난 백년과는 다른 새로운 백년의 신작로이다.
<개벽신보>를 함께 읽고 논하는 세미나도 해보고 싶다. 당장은 개벽학당이 가장 어울리는 장소이다. 지난 3월 6일 개벽학당의 문을 열었다. 촛불혁명을 지나서도 촛불세대라고 할 만한 신진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하노이 대장정을 감행한 북조선의 리더는 이미 30대이다. 하건만 한국은 30년 전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 여태 나라를 끌고 간다. 어느 쪽이 세대교체에 성공한 젊은 국가인가 냉정하고 냉철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세대를 개벽해야 하겠다. 개벽세대를 양성해야 하겠다. 그리고 그들의 감각과 사상을 반영하는 새로운 매체의 창간도 거들어야 하겠다.
그러나 여전히 충분치 못하다. 한국의 벽청(개벽하는 청년)들만으로는 미진하다. 북조선에서도 벽청을 키워 가야 하겠다. 남과 북의 벽청들이 어울려 <개벽신보>를 함께 읽어가는 가까운 미래를 내다본다. 장소 또한 평양이나 서울은 적절치 않다. 개성이 최적이다. 개성은 본디 개경(開京), 열린 도시, 오픈 시티였다. 개경으로 이어지는 예성강의 끝자락 벽란도는 유라시아의 만인과 만물이 오고가는 허브(hub=接)였다. 또한 개경은 최초의 대학, 국자감이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21세기의 문명대학, 개벽대학을 세움직하다. 개성공단은 재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확대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겠다. 대학을 세우면 청년과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모여든다. 개성을 20세기형 산업단지, 공업도시로 만들어서야 쓰겠나. 21세기형 문명도시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14-15세기의 베니스, 17-18세기의 암스테르담, 20세기의 뉴욕을 참조해 볼만 하다. 응당 북과 남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기왕이면 동북아연합의 국제개벽대학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개성에 개벽대학을 세우자. 그리고 ‘고려청우당’도 재건하자. 그래서 그 개벽인과 미래인들이 주역이 되어 만들어가는 통일된 동학국가의 대망과 대업도 완수하자.